해진의 일기

근래에는 삶을 향해 자꾸만 떠밀리는 기분이다. 내게 향하라고 하신 길은 죽음에 보다 가깝고 어둡고 칙칙한 것임에도 삶은 한여름의 아침햇살처럼 맹렬하게 찾아들었다. 2월 7일의 일기.

그의 편지와 원고가 오는 날이면 세상을 다 얻은 듯 기쁨이 넘실거리었다. 암흑 같은 세상에 나의 그림자를 숨기고 오로지 그를 쫓아 달리었다. 옳다. 이 길은 나의 참된 길이요. 정도요. 속죄의 길이리라. 이토록 짧은 생을 마무리 지을 매듭이 분명했다. 답장을 보내고 한참이 지났는데도 편지도 원고도 오지 아니하는 날이면 지천에 우울을 뚝뚝 흘리며 걸어다녔다....

모르겠다. 도통 무어가 진실인지. 거짓인지. 실재하는지. 심지어는 나조차도. 꿈은 무한히 퍼져나가는데 시간은 유한하니 마음은 조급하다. 내가 모르는 것이 두렵다. 36년 9월 12일의 일기.

아해와의 잡담

일전에 편집실 있을 적의 일이다. 그날은 날이 퍽 좋아서 짐 들어주는 명목으로 일하던 세훈이를 데리고 끽다점 구석에서 작문을 한 일이 있다. 칼피스 한 잔을 쥐여주고 편지를 쓰고 있는데 갑작스레 아해가 묻는 것이다. 그런데요. 선생님, 제가 궁금한게 있는데. , 응? 저번부터 왜 우표를 거꾸로 붙이세요? 응? 아. 이거? ... 음... 일종의 그리움이라는...

평소에는 늘상 와락 웃음을 타트리던 윤이가 내 생전 처음으로 울상을 보인 일이 있었다. 기실- 윤이 남몰래 우는지 어쩌는지는 모르겠으나, 적어도 나나 맴바들 앞에선 그리 호탕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와 내가 알기 시작한지 반년쯤 지났을까. 그날 그는 대뜸 나를 찾아와선 술도 하지 않고 그것도 맨정신으로! (놀라 쓰러질뻔 한 것을 겨우 참으며 그의 이야기를...

경성역 근방의 끽다점들은 약속이나 한 듯 자정이면 문을 닫는다. 기분전환을 위해 한산한 끽다점에 들어가 コーヒー를 마시며 글을 쓰다 실수로 통금시간을 놓치면 조선인 사장은 창을 가리고 양초의 심지를 짧게 하여 내 곁에 두었다. 어둑한 가게 안에선 소파에 앉아 짧은 잠을 청하는 그의 숨소리와 내가 침침한 눈을 비비며 펜을 놀리는 소리만 가득했다. 나는 말문을...

땅 위에 비죽 솟은 돌 하나를 못 보고 넘어지었드니 일순간 내 무릎이 비명을 지르고야 마는 것이다. 안경은 저 멀리 날아가서 돌아올 기미도 없다. 다행스러운 것은 거리에 사람이 없기에 낯부끄러울 일이 없었다는 것이다. 발목을 접질렀는지 금세 복숭뼈가 화끈하였다. 수 초만에 절름발이가 되어 안경을 주우러 움직거리는 데에도 통증은 수반되었다. 흙먼지 앉은 안경...

죽음을 바란 적은 단 두 번 뿐이었다. 아직 어린 시절 그것이 죽음인 줄도 모를 적에 어머니에게 가고 싶다고 떼를 쓰다 아버님께 혼이 난 것과 몇 년 전 폐병을 판정받은 날이었다. 그랬던 내가 다시 삶을 꿈꾼 것은 등단했다는 기쁨이 첫 번이었고 내게 날아온 편지의 내용이 둘째 번이었다. 그리고 그 생에 대한 열망은 소설을 마저 완성하여 나를 남기는 것으로 ...

편지를 마무리짓고 며칠 후부터 앞이 잘 보이지 않았다. 공포는 순식간에 나를 덮쳤다. 이런 때 아해가 답장을 보내온다면 어떻게 하나. 나는 그걸 읽어줄 이도 없는데. 원체 눈이 좋은 편은 아니었으나 지금은 달랐다. 어두운 눈을 비비고 밝은 태양 아래에서 글줄을 써도 내겐 흐릿하기만 했다.

가을 비가 추적추적 내리기 시작하면 지천에 낙엽이 떨어져 가을 냄새가 물씬 풍긴다. 우산을 바로 쓰고 툭. 툭. 떨어지는 빗소리를 즐기려 마당으로 나서면 고뿔에 들기 쉬우나 이 또한 어느 뮤즈가 되어 돌아올지 모르니 밖으로 나서는 수 뿐이다. 그녀도 경성에 있다고 하였으니 이 빗소리를 듣고 있을까. 창문에 툭툭 부닥치는 고 예쁜 소리를 내가 당신께 가 노크...

얇은 실같은, 예민한 신경으로 살아내는 사람들이 있다. 내가 그렇고 나의 벗도 그렇다. 이 여린 것들을 하나씩 보듬어 숨을 죽이고 귀를 기울이면 그것들은 나름대로 울거나 웃거나 소란을 피운다. 그 예민한 신경을 가진 이들을 서로 알아볼 수 있는 것은 그들만의 특권이라고 할 수 있다.떨리는 손으로, 입 안에 맴도는 생생한 단어들을 하나씩 꺼내거나 여러겹의 붓...